남편이 남긴 냉장고 메모

박 선생님은 아내분과 아홉 살 차이가 나신다.

한인 평균수명을 보면 남자가 78세, 여자가 85세 이다. 거기에 부부의 평균적인 나이 차를 더하면 박 선생님의 경우, 아내분은 남편 없이 15 년 정도를 혼자 사시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 선생님은 그 계산을 이미 해보신 분이었다.

중가주에서 자영업을 20 년 가량 하셨다. 내년에 은퇴하신다고 했다.

“정리를 좀 하려고 합니다.”

“급하신 이유가 있으세요?”

“제가 하는 게 아니고요.” 그분이 말씀하셨다. “집사람 때문에 하는 겁니다.”

서류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결혼 생활 35년 동안 집안의 모든 돈 문제를 남편 분이 혼자 하셨다고 했다.

“집사람은 체크도 안 써봤어요. 은행에 사인하러 간 적도 없고요.”

“지금이라도 좀 가르쳐 드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 나이에 그게 되나요.”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애들이 봐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뭐든지 아주 간단하게 해 놓으려고요.”

소개하는 상품에 비용이 얼마인지는 별로 따지지 않으셨다. 보통은 그게 제일 큰 질문인데 이분은 아니었다.

“이게 매달 얼마씩 들어옵니까?” 그분이 물으셨다.

“3천불 정도 됩니다.”

“그럼 됐습니다.”

매달 자동으로 들어오게 만들어 두고, 공과금과 재산세는 자동으로 빠져나가게 해뒀다. 아내분이 따로 뭘 결정하거나 어디에 전화할 일이 없도록 만든 구조였다.

도움 드리던 일이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그 댁에 들렀을 때, 냉장고에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박 선생님 글씨였다.

맨 위에 체크 리스트 라고 적혀 있었고.

매달 초에 들어오는 돈. 매달 자동으로 나가는 돈. 그리고 그 밑에 아들 전화번호와 내 사무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이것만 알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 것.”

노후 준비라고 하면 얼마를 모아야 되는 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데 이분이 하신 건 좀 달랐다. 액수를 더 키운 게 아니라, 남을 사람이 헷갈리지 않도록 노후를 단순하게 만들어 두신 것이다.

나이가 들면 결정하는 일 자체가 힘들어진다. 기억도 예전 같지 않다. 그때를 위해서 미리 줄여두는 것. 통장을 하나로 합치고, 자동 이체로 바꿔놓고, 종이 한 장에 적어서 붙여두는 것.

이건 돈이 많고 적은 것에 상관없이 누구나 오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냉장고 자석으로 붙인 종이 노트를 사진으로 찍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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