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살았다는 생각
남편을 보내고 두 달이 지나서야 강 여사님은 우편물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은 머릿속이 하얬다. 친척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집이 조용해지자 식탁 위에 우편물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재산세 고지서, 보험 갱신 안내 편지, 아래층 세입자가 넣어놓은 쪽지, 이름 모를 회사에서 온 청구서들.
한 시간쯤 앉아 있다가 강 여사는 다시 봉투들을 모아 놨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처음 통화할 때 강 여사님은 내게 자꾸 미안하다고 하셨다.
“이런 것도 모르고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재산세라는 게, 일 년에 몇 번 내는 거예요?”
“두 번 냅니다. 12월 하고 4월이에요.”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 적는 소리가 났다.
73세 이셨다. 미국에 사신 지 40년이 넘으셨다.
“남편이 다 알아서 하고, 나는 생활비를 남편한테 받아서 썼어요.” 그분이 말씀하셨다. “막상 혼자 살림을 하려니까 되는 게 없네요. 이 나이까지 헛살았다는 생각도 들고.”

집은 2 유닛 듀플렉스 였다. 위층에 강 여사님이 살고 아래층은 세를 줬다.
“이 집은 어떻게 하실 생각 이세요?”
“팔아야죠. 세입자 관리를 제가 어떻게 해요. 지난 달에 하필 파이프에서 물이 조금 새어 나왔는데 누구 한테 전화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작은 집으로 옮기기로 하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니어 주택 단지들은 대부분 외곽에 있습니다.”
“저는 운전을 못 해요.”
그래서 외곽은 다 제외시켰다. 도심 쪽의 작은 시니어들이 살만 한 콘도로 범위를 좁혔다.
그러다 강 여사님이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주변에서 그러는데요. 애들한테 명의를 넘기고 노인 아파트로 들어가면 된다던데.”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자녀분하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제가 좀 봤습니다.”
K 씨가 잠깐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저는 그런 게 무서워요. 편법 같은 거요. 평생 그런 거 안 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콘도로 옮기시고 몇 달 뒤에 통화를 했다.
불편한 건 없으신 지 여쭤봤는데, 그분이 먼저 다른 얘기를 꺼내셨다.
“저 어제 보험회사에 전화했어요.”
“아, 자동차요?”
“집 보험이요. 갱신하는 거요. 영어로 하는 건데, 제가 했어요.”
별것 아니라는 말투가 아니었다. 아주 큰 일을 해낸 사람의 말투였다.

전화를 끊고 처음 통화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었다.
헛사신 게 아니었다. 한 번도 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일흔셋에 처음 해보셨고, 해보니까 되셨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돈 문제를 도맡는 집이 많다. 편해서 그렇게 된다.
그런데 그 편한 것이 남은 사람에게는 꽤 무거운 짐이 된다. 지금 두 분 다 건강하실 때, 잘 모르는 배우자가 틈틈이 한 가지씩 맡아 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각종 계좌 확인하기, 전기요금 한 번 내보기. 부부가 영원할 수 없기에 혼자 독립적인 생활을 미리 미리 연습해야 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