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그스태프 (Flagstaff)

John 씨는 일 년에 한 두 번쯤 예고도 없이 사무실에 나타난다.

그날도 문을 열면서부터 말을 시작했다. 주차가 어땠고, 오는 길이 어땠고, 요새 기름값이 어떻고. 원래 밝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그를 반갑게 맞지 못했다. 작년 이 맘 때 헤어지던 그 얼굴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년 전에 만났던 John은 이렇게 말했다.

“북가주에 있는 여동생 집에 한 달쯤 있다 왔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요.”

“…무슨 일인데요.”

“자궁암이래요. 3기 말인지 4기인지. 병원에서는 이제 석 달에서 여섯 달 남았다고 했대요.”

수술로 자궁은 다 드러냈는데 항암이 잘 듣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도 함께 올라가서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모임. 반가움이 아니라 오빠와 아버지가 각각 여동생과 딸을 먼저 보내는 자리였던 셈이다.

John은 전에도 여동생 얘기를 가끔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알아본다는 얘기, 입양 절차가 시작됐다는 얘기, 그러다 갑자기 암이 발견됐다는 얘기. 모든 이야기들이 그날 다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래서 올해는 안부를 먼저 묻는 게 겁이 났다. 그래도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여동생분은… 좀 어떠세요.”

“아, 걔요?” John이 오히려 태연했다. “다 좋아졌어요.”

“…네?”

이야기는 이랬다. 시한부 판정을 받던 날, 여동생이 UCLA 병원의 담당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나요. 틀려도 괜찮으니까, 한 가지라도 제가 매달릴 방법을 알려 주세요.”

의사가 조심스럽게 애리조나의 플래그스태프 (Flagstaff) 라는 곳에 가보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가끔 비의학적으로 완치되는 그런 사례가 있으니, 원하면 한번 가보라고.

그래서 여동생은 거기서 별장을 하나 빌려 열 달을 지냈다. 소나무 숲을 천천히 걷고, 별장 앞에서 햇볕을 쬐고, 밥은 자연식으로 소식하고.

열 달 뒤 병원에서 95 퍼센트 회복 판정을 받았다.

“거기가 왜 그런 가 하면요, 자기장이 가장 센 곳이예요. 그리고 고도도 높아서……”

John의 설명은 거기서부터 30분쯤 더 이어졌다. 걱정했던 여동생의 안부를 확인했더니 중간 설명은 솔직히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절반은 흘려들었다.

한참 떠들고 나서야 John이 오늘 온 본래의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걔가 이 근처로 이사 오려고 하거든요. 집 좀 알아봐 주세요. 파트타임 일자리도 구한대요.”

동생이 살 집을 알아봐 달라는, 아주 평범한 부탁이었다.

나는 그 평범한 부탁이 너무도 반갑고 모든 생명이 살아 숨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메모지에 조건을 천천히 받아 적었다. 방 두 개, 계단 없는 집, 볕이 잘 드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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